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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초상사진의 세 가지 역활: 대중화,통제력,예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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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사진의 세 가지 역활:

대중화,통제력,예술성

                                                     김석원(시각예술평론, ksw5053@naver.com) 

 

 

초상화(portrait)의 의미

 

초상화는 사람의 용모나 자태를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오늘날 사진에 의한 초상이 일반화되기 전에 초상화는 사진의 역할을 대신 선행했던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서 기록하려고 했던 노력은 고대의 초상조각에서 시작하며, 초상화가 성행하게 된 것은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다. 18세기 후반에 새로운 신분계층인 중산층의 초상화에 대한 요구와 오늘날의 사진에 이르기 까지 오랜 시간 동안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초상화와 초상사진은 그 사람의 외면적인 모습과 아울러 그 시대의 시대적인 정신을 기록한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인간 욕망의 다양한 이면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명함판 사진의 대중화

 

사진발명 초기의 초상사진(Portraits)은 아돌프 외젠 디스데리(Adolphe Eugene Disderi, 1819~1889)의 ‘명함판(Carte de Visite, 명함이라는 뜻) 사진’ 에 의하여 대중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스데리는 1854년 파리에서 사진관을 개업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에 명함판 사진을 특허로 받게 되었는데 그 카메라는 규격 사이즈의 원판으로 가로 5.69㎝, 세로 8.44㎝ 크기의 음화 필름 8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시기의 명함판 사진은 오늘날 얼굴을 중심으로 촬영한 증명사진과는 구별되는 인물의 전신모습을 촬영한 명함크기의 사진을 의미한다.

명함판 사진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디스데리에게 포즈를 취해준 후에 일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생일이나 경축일에 교환되기도 했고,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는 명함판 사진 앨범이 사교계에서 일반화되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부흥하여 디스데리의 명함판 사진 사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명함판 사진의 등장은  사진을 대중화시킨 사실은 분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한 대중의 범위는 중산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하층민들도 명함판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소유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함판 사진의 대중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위시한 일반 서민들이 사진을 소유하는 것은 그들의 경제적 능력이 못 미치기 때문이었다. 

사진 발명 이전에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가 귀족 계급을 중심으로 한 전유물로서 부와 권력의 상징물로 기능하면서 중산계층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다게레오타입과 실물크기의 초상은 중산층 이상의 전유물로서 그 이하의 계층에서 소유는 배제되었다. 이렇듯 명함판 사진은 거시적인 입장에서 대중화를 지향하는 듯 보이지만 계급의 층위에 따른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산층과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서 제한적으로 애용되었던 명함판 사진은 촬영된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 상승의 상징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명함판 사진에서 보여지는 인물사진은 하나같이 획일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이미지로 상품화된다. 이를테면 아래에 있는 명함판 사진의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족들의 집의 한 단면을 인공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모방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흉내 낸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난간 곁에서 외투의 단추가 풀려있거나 잠겨져 있으며, 중절모자를 들고 있는 손의 위치를 바꾼 장면들과 의자에 앉아있거나 난간에 기대어 있는 다양한 포즈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포즈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이들의 모습은 개개인의 개성이 상실된 상투적인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사진이다.

 

 


 
 

                       (사진,1,)앙드레 아돌프 디스데리,<동일 원판에 6개의 명함판초상>,1858, 프랑스 국립 도서관, 파리.

 

이 시기에 제작된 명함판 사진들은 전신상의 모델이 취한 포즈와, 배경 장식으로 사용한 커튼, 모델의 의상이나 액세서리 등 무대 소도구가 다른 사진들과 너무 유사하다. 명함판 사진에 보이는 여러 장의 다른 사진 속에서 차이점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같은 배경에서 사람만 바뀌면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일한 배경이라도 대상화된 사람 자체의 고유한 분위기 때문에 다른 느낌의 사진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조명과 포즈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모델이 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드러내는데 노력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런 식의 촬영 방법은 현대에 와서 웨딩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데 있다. 굳이 비교를 해서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자신들의 현재 신분을 끌어올려서 이상화된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본 뜬 이미지를 내포한다는 것, 그런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서 고급스런 의상과 배경이 그들을 떠받쳐 준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방법은 자신의 신분상승 욕구가 사진을 통해서 욕망이 분출된 것이다. 하지만 사진을 통한 자신의 개인적인 모습을 ‘기록(Document)’하는 행위에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 계층의 이미지와 분위기를 자신이 소화하여 타인에게 보여주고 그런 바뀐 모습을 스스로 보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볼 문제는 이런 일회적인 자기 연출로 인하여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명함판 사진에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이동식 홀더’를 사용하여 나온 사진의 결과물에 관한 부분이다. 아래의 사진은 하나의 원판에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중년남자의 모습에서 현대의 ‘밀착사진(Contact Print)’의 한 단면을 떠오르는 것이 필자의 사견일수도 있지만 이 사진에서는 사진속의 모델이 찍히는 시간의 흐름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6장의 사진이 한꺼번에 보이기 때문에 한 장의 사진으로 단독적인 기능을 할 때와는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한다. 이처럼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던 명함판 사진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1860년대 이후로는 명함판 사진에 대한 유행이 사라졌다. 하지만 유명인사와 왕족의 명함판 사진들은 수집가들의 수집대상으로 남아 있게 된다.

      

증명사진의 대중적 통제기능

 

증명사진(證明寫眞)이란 우선 일차적으로 본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사진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촬영되어진 것은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했었던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증명사진이 기록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정확하고 객관적이라는 특성에 기인했는데 이로 인해 증명사진은 과학적, 역사적 세계관과 맞물릴 수 밖에 없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이러한 속성은 19세기의 다양한 인간학 분야에 서 초상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작업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아울러 19세기 유럽의 학문체계를 주도했던 유형학(typology)에 부합하려 했다. 즉, 기록적인 초상은 복잡한 인간의 얼굴을 특징과 형태별로 분석하고, 분류하는 유형학적 사고에 부응하기 위해 연구표본을 간편하게 저장해서 비교와 검토를 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든다. 이러한 방법론은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났으며, 가장 전형적인 분야가 인종학 인 것이다.

인물의 정면과 측면을 기록하는 인종학의 인체측정 사진술은 알퐁스 배르티옹(Alphonse Bertillon, 1853~1914)이 카메라의 시각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범죄 용의자의 신원확인 초상에 사용되어졌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개인들을 구별하고 분류할 수 있게 하는 간편하고 절대적인 방법이었다. 촬영방식은 모델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하였으며 촬영의 신체 범위는 통일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모델은 중성의 배경 앞에 앉으며 균일한 확산광 하에서 촬영된다. 사진의 비교와 분류의 정확성을 위해서 모델은 어떠한 변화를 주지 않는 촬영방식의 규격화에 따른다. 또한, 모델들은 언제나 렌즈로부터 동일한 거리의 위치에서 정면 측면의 순서에 의하여 포즈를 취한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나라에서도 범죄사진을 촬영 할때 사용되고 있는 형식이다. 이 부분을 좀더 확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우리들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사진관에서 촬영하는 증명사진 역시 배르티옹이 사진을 찍을 때 선택한 방법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도 정면을 향하고 똑바로 앉은 상태에서 흰색, 회색의 배경에서 행동반경에 제한을 받으며 불편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개성, 특성과 자연스러운 동작이 사진에 나타나는 것은 애초에 무리가 있다. 이렇게 찍은 사진이 본인의 마음에 드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식으로 촬영된 사진은 개인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는 여권,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사용된다.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개인의 신원에 관한 정보를 사진을 통해서 수집, 파악하는 것인데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경찰서를 가게 되면 개인의 정보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진,2), 알퐁스 배르티옹(Alphonse Bertillon,),<베르티옹 카드>,1885.

 

 

증명사진의 예술적 가능성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모습을 기록하는 방법이 사진 역사의 초창기에서부터 자연스럽지는않았다. 증명사진의 사진적 접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예술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사진가 아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96~1964)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사진들이 지금의 증명사진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의 작품들은 개인의 모습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한 시대와 사회의 구성을 보여주는 개인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사진을 살펴보면, 1910~50년대까지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 하에 있었던 독일사회의 모든 계층을 직업, 지역, 연령별 등으로 구분하여 그 사람들을 상대로 사회학적, 유형학적으로 인물작업을 분리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인종학의 인체 측청 사진술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알퐁스 배르티옹에서 출발이 된 것이다. 그의 사진을 살펴보면, 특징적인 요소로는 대상을 바라볼 때의 객관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정면을 똑바로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개인의 특성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서 개인을 편입시켜서 분류, 체계화시키는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대상화된 인물의 초상은 각자의 개인적인 특성이 결여된 무미건조한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사진 적 접근태도는 대상이된 사람의 출신성분과 그 시대의 상황을 솔직하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잔더의 사진에서 보여 지는 결과물은 ‘개인의 출신 성분’을 남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주어진 계층에 대한 위계질서(hierarchy)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잔더의 사진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일정한 거리 두기를 유지하고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태도에 있어서 유형학적인 습성을 유지하고 있다. 형식적인 방법으로는 카메라의 메커니즘이 가지고 있는 선명한 초점(fan focus)을 이용해서 대상의 모습에서 구체적이며, 정확한 재현방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잔더의 객관주의적 시각과 합당한 방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과적으로는 대상의 모습이 각자의 개성이 정확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양상을 지니면서 사회의 전형적인 역할을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는 그의 작업에서는 오로지 사람만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작업은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을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한 차원 승화시킨 방법이었다. 그리고, 잔더가 대상을 관찰하는 행위에 있어서 사용되었던 유형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3),아우구스트 잔더, <미장이 십장>, 쾰른, 1932.     

 

 

유형학(typology)적 사진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캘리포니아의 뉴포토 하버 미술관(Newport Harbor Museum)에서 큐레이터 ‘마크 프레이 듀스(Marc Freidus)’에 의해서 유형학(typology)이란 이름으로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을 출발점으로 본다. 독일 뒤셀도르프의 예술아카데미에서 사진학을 가르치는 베른트ㆍ힐라 베허 (Bernd & Hilla Becher)부부와 그들의 학생들인 토마스 슈트루트(Thomas Struth), 토마스 루프(Thomas Ruff),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등을 중심으로 한 9명의 현대 사진가 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독일의 베른트ㆍ힐라 베허 부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발되었으며, 1950년대의 주관주의 사진에 대한 반동으로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주관주의 사진의 추상적이며, 개인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을 거부하면서, 객관적이고 정밀한 사진스타일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작가는 토마스 루프를 언급할 수 있다. 그는 증명사진의 형식을 갖춘 똑같은 인물들의 초상 사진에서 각자의 개성이 상실된 획일성과 함께 인간을 사회조직의 구성성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베허부부와 토마스 루프의 사진적인 접근 방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우선, 대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는 것이 베허부부의 시각과 유사하지만 다른 점은 대상성이 틀리다는 것이다. 즉, 베허부부가 급수탑과 창고를 기록하였다면 잔더는 독일국민의 계급과 직업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잔더와 토마스 루프가 동일한 방법은 대상을 정면으로 향하게 하고 있고 무표정한 모습으로서 사회구성원의 객체로 파악하는 ‘시리즈의 유형학적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특수계층만을 상대로 제한적으로 촬영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데 유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차이점은, 토마스 루프의 경우 인물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배경이 단순화되는 반면에, 잔더의 인물사진은 직업에 관계된 환경을 함께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루프의 사진적인 접근 방식에 있어서 주목되는 부분은 원작주위의 단일사진으로서가 아니라, 유형학적으로 그룹화되고 배열되는 비교 사진술에서 그들의 사진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이들의 사진은, 벤야민이 잔더의 사진에서 언급하였던 ‘비교 사진술’의 효과가 오늘날에 있어서 다시한번 확인된다. 덧붙여서 토마스 루프는 잔더의 사진 적 스타일과 증명사진의 형식을 사용하여 증명사진이 예술적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언급을 했던 역사적인 논의를 통해서 그의 작업을 정당화 시키는 것이다.

 

 

 
 

                                             (사진,4),아우구스트 잔더, <쾰른의 제빵사>,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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